일제강점기 군산은 수탈 거점이 되었습니다. 근대역사박물관 3층에 위치한 근대생활관은 일제의 강압적 통제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치열한 삶을 살았던 군산사람들의 모습을 재현한 공간입니다. 근대생활관은 ‘도시의 역사’, ‘수탈의 현장’, ‘서민들의 삶’, ‘저항과 삶’, ‘근대건축물’, ‘탁본체험’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각 연출공간에는 1930년대 군산의 모습을 재현하여 관람객의 이해를 돕고 있습니다. 먼저 군산의 역사를 간단히 살펴본뒤, 근대생활관에 전시된 내용 위주로 군산의 스토리를 알아보겠습니다.

우선 일제강점기 군산의 역사입니다.

1910년 군산이사청 폐지, 군산부 설치

1912년 호남선철도 지선으로 군산선 개통

1914년 조계지를 폐지하고 동 지역을 군산부에 포함, 옥구군이 임피군 및 고군산군도와 충남의 개야도 등을 통합

1915년 군산 제1수원지(월명호수) 완공

1918~1921년 2차 축항공사

1919년 호남 최초의 3.1만세운동 군산에서 일어남

1920년 조선노동공제회 군산지회 설립

1923년 군산부의 행정구역이 93만평 정도로 확대, 불이흥업(주)에서 현재의 옥구읍, 옥서면, 미성동 등 750만평 매립

1926~1932년 3차 축항공사로 뜬다리 3기건설

1927년 신간회 군산지회 설립. 옥구농민항쟁 발생

1932년 군산부의 행정구역이 233만평으로 확대. 이만수씨 경성고무 설립

1934년 군산항에서 일본으로의 쌀의 수탈량이 200만석을 넘음

1936~1938년 4차 축항공사

1937년 채만식의 탁류가 조선일보에 연재 시작

1940년 군산부의 행정구역 확대, 옥구군 개정면과 미면 일부를 군산부로 편입

1945년 광복(일본인 귀국을 위하여 군산국민학교에 집단 수용 후 선편을 이용


이러한 일제강점기 군산의 서민들의 생활과 상황에 대하여 군산 근대역사박물관의 근대생활관에서 전시 및 설명하고 있는 상세 내용을 알아봅니다.

조선시대 군산은 전국 최고의 곡창지대인 호남평야의 세곡이 모이는 군산창과 이를 보호하기 위한 군산진이 설치되어 경제, 군사적 요충지로 중시되었다.

1899년 5월 1일 군산항의 개항과 더불어 해안 일대에 조계지를 설치하고, 개항장을 관리하는 옥구감리서를 두었다. 대한제국은 구산 조계지가 일본에 독점되지 않도록 각국의 공동조계지로 정했으나, 개항이후 군산은 일본제국주의의 필요에 종속되어 왜곡된 성장을 겪었다.

군산은 성장과 함께 식민지 수탈로 몰락한 충청ㆍ전라ㆍ경상도의 농민과 지식인,자사간가들은 새로운 삶터를 찾아 군산으로 모여들었다. 이들은 다양한 조직을 만들어 자신들의 생존권을 지키려했을 뿐 아니라 나라를 빼앗기고 차별받는 동포들의 권익을 지키기 위해 노력했다.

개항이후 일제는 군산에 목포영사관 분관을 설치했고, 1906년 군산이사청이 개설되면서 일본인들이 군산을 장악하게 되었다. 이후 일본인들은 적극적으로 토지를 확보하고 사업을 확장하면서 부를 축적해 나갔다. 쌀 수탈항으로 호황을 누리면서 군산은 고향에서 농토를 빼앗기고 쫓겨난 농민들이 목숨을 연명하기 위해 찾는 도시가 되었다.

영동상가는 일제강점기 군산최고의 번화가였다. 일본인들은 이거리를 행정구역상 영정이라는 표현의 일본식 발음으로 사까에마찌라 불렀지만, 조선인들은 송방거리 혹은 송방골목이라고 불렀다. 그 이유는 당시 이곳에서 상가를 운영하는 사람들 중에 개성상인이 다수 있었기 때문이었다.일제는 군산 지역에 내항철로 개설, 대형 창고와 부잔교 건립 등의 축항공사를 통해 호남지방의 쌀을 일본으로 용이하게 수탈하고자 했다. 축항공사 후, 군산내항에는 수백만석의 쌀이 산덩이처럼 쌓여 있었고 그 쌀들은 일본의 오사카와 시모노세끼 등으로 실려 나갔다. 그렇게 많은 쌀이 있었지만, 조선인들은 만주 등에서 들여온 조와 같은 잡곡류와 술찌기미 등으로 끼니를 이어갔다. 미곡취인소는 미두장으로도 칭하는데 일제강점기 증권거래소라고 할 수 있다. ‘미두’란 곡식을 사고팔면서 생기는 시세 차이를 통해 이익을 얻고자 하는 일종의 투기행위였다. 당시 쌀의 시세는 하루에 여러번 변동했는데, 가장 큰 소비지였던 일본 오사카 시세에 크게 영향을 받았다. 미곡취인소에서는 오사카 시세를 전화로 전달받아 공시했는데, 지금의 주식거래소와 비슷한 구조였다.

‘군산좌’는 일제강점기때 군산에 만들어진 극장이다. 이곳에서는 오늘날 극장과는 달리 영화와 연극을 병행하여 상영했다고 한다. 또한 1920년대 군산사람들의 대표적인 문화공간으로서 민족운동의 기금을 마련하기 위한 다양한 공연들과 모임들이 이루어졌다고 한다.

일제의 침탈에 대항하던 의병운동은 을사늑약 이후 전국적인 규모로 확대되었는데, 당시 활약하던 군산출신의 대표적인 의병장으로는 임병찬 의병장을 들 수 있다. 의병항쟁 이후 일제의 수탈에 대응하기 위해 개항장 군산의 조선상인들은 옥구군산항민단을 결성했고 이 단체를 매개로 하여 계몽단체인 대한협회 군산지부를 설립하여 교육 및 산업발전을 위해 다양한 활동을 펼쳤다. 이러한 계몽운동의 결실이 3.1만세운동이라고 볼 수 있다. 군산의 3.1운동은 영명학교에서 시작되었고 그해 5월까지 총 21차례 계속되었는데, 참가한 인원이 2만 5천명을 넘었다.

군산에는 개항 초부터 부두에서 하역작업에 종사하는 노동자들을 중심으로 노동회사와 조합의 성격을 혼합시킨 노동조합이 결성되어 있었는데, 1920년대 들어서 30여개에 달하는 다양한 노동조합이 만들어져 활동했다.

근대 이후 군산항의 물류유통 중심지로서의 역할로 인하여 군산에는 근대문화유산이 집중되어 있는데, 특히 근대건축물이 다수 현존하고 있다. 대표적인 건축물로는 (구)조선은행 군산지점, (구)군산세관 본관, (구)장기십팔은행 군산지점 ,(구)군산전기회사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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